[서울]정동제일교회

최초의 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

서울의 기독교문화유산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한문 옆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면 동화에나 나올것 같은 멋진교회가 보입니다. 이 교회가 아펜젤러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정동제일교회 입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가시면 벧엘예배당에서 아펜젤러선교사의 사역과 정동제일교회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약사


1885년 10월 11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에 의하여 정동 사저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하였으나, 1887년 9월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하고 교회이름을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이라 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서재필()이 오랜 동안의 미국 망명생활로부터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협성회는 정동교회청년회의 노병선()·이승만()·신흥우() 등이 주도하였다.

1894년에는 교인수가 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신장 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김인식()·이흥렬() 등의 음악가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에는 전 교인이 참가하여 일제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았다. 이때의 담임목사는 이필주()로서 33인 중 한 사람이다. 또한, 이 교회의 장로였던 박동완()도 이필주 목사와 함께 33인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정동교회는 두 사람의 민족대표를 낸 교회가 되었다.

학생동원은 정동교회 소속인 김진호() 목사가 배재학당 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그 임무를 맡았고, 정득성() 장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므로 모두 붙잡혀서 가을까지 저녁예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청년들은 그 해 3월부터 8월까지 비밀리에 『독립신문』 을 제작, 등사하여 배부하다가 붙잡혀 징역형까지 받았다.


3·1운동 이후에는 주로 문화운동과 무산대중을 위한 야간학교 개설 등을 통한 선교활동을 전개했고, 1930년에는 남북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해 하나의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 창설에 교회직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3년에는 김인영() 목사와 신흥우 등이 서울의 일부 장로교 지도자들과 손잡고 신앙단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말기의 억압과 역경을 잘 극복한 정동교회는 광복과 함께 감리교단의 분열에 휘말렸으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화해를 강조한 끝에 드디어 1949년에 재건파·부흥파의 합동총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예배당 강대 쪽이 폭파되면서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다. 1976년에 문화공보부가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함에 따라 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선교100주년 기념예배당은 이 문화재 예배당을 비켜서 그 뒤에 지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정동제일교회 [貞洞第一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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