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최대순교성지 염산교회의 순교자

염산교회 임준석 목사

염산교회는 77명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한국기독교사에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10월7일부터 3개월에 걸쳐 순교의 길을 가게 되는데 석 달의 기간이 있었기에 피난 가려면 얼마든지 피난 갈 수도, 피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염산교회 순교자들은 교회가 불탄 이후에도 숨어서 예배를 드렸고,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면 두려워하거나 비굴하지 아니하고 천국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순교자의 길을 갔다.
순교자들 앞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돌아갈 천국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고, 공산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자신보다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날뛰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찬송하며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당시의 목격자였던 안종열 목사는 왜 당시에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과 회유를 받으면 쉽게 전향하여 그들과 함께 하는데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떤 위협과 달콤한 회유를 받아도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전향하지 않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무조건 죽였다”
순교자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땅에서 더 살기를 원했다면 저들의 뜻을 따라주고 타협하며 사는 길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갔다.
당시 담임이었던 김방호 목사님의 가르침의 메시지가 성도들의 마음에 간직되어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간다는 천국신앙이 온 성도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신앙은 장년 성도로부터 어린 주일학생에 이르기까지 간직한 수난시대에 천국을 소망하는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믿음의 모습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들에게 천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눈만 감았다 뜨면 천국이 열린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고 담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교자들의 담대한 신앙의 모습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고귀한 신앙 그 자체이다.
어떻게 죽음 앞에서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
찬송하며, 자신을 죽이는 그들을 용서하며, 복음을 전하며 순교의 제물이 되었을까?
땅의 것을 바라보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을 것인데 위엣 것을 바라보며 나아간 순교자들, 그들 앞에는 돌아갈 천국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그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기독교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단은 성도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이 때, 순교자의 신앙으로 무장하지 아니하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속화의 물결에 쉽게 휩쓸리고 말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순교자들의 피와 생명을 바탕으로 오늘의 부흥을 이루었다
이처럼 값진 순교신앙의 유산을 일깨워 점점 둔화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회복하여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1. 생명으로 믿음을 증거한 순교자들

순교자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생명으로 증거한 사람들이다. 생명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다.

생명이 소중하지만 바로 이 믿음을 위하여 생명을 내 놓을 수가 있었던 사람들이 순교자이다.

순교자란 그리스도 복음을 믿고 이를 증언하다가 그 일로 인해 원수에게 고난과 죽임을 당하되 타협이나 배교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앙고백에 흔들림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순교자들은 초대교회의 스데반집사처럼 하늘을 우러러 보는 신앙이 있었기에 처참하게 원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자신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날뛰는 그들이 더 불쌍했고 안타까웠던 것이다.

2. 염산교회 순교자 77인
한국기독교최대순교성지인 염산교회는 단일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염산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을 증언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살펴보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천국을 향하는 확실한 신앙이 있었다.
당시 담임이었던 김방호 목사님의 가르침의 메시지가 성도들의 마음에 간직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갑니다. 예수를 믿다가 고난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불행이 아니고 영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급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습니다.”
이 신앙이 성도들의 마음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에게 천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눈만 감았다 뜨면 천국이 열린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신앙은 천국신앙이었다.

1) 염산교회에 밀어닥친 한국전쟁의 아픔
염산교회는 6.25전쟁이 터진 후 7월 23일 주일 낮 예배를 마지막으로 교회문은 닫혀 지고 성도들은 흩어져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때부터 예배당은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사택은 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10월7일 교회당이 공산당에 의해 불길에 휩싸이게 되면서 순교가 시작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 11권 618페이지에는 염산교회 수난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28 서울 수복 이후에 영광에 국군과 유엔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이들을 환영하는 우익청년들의 만세환영대회가 열렸다. 이를 기화로 미처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라고 했다.
1950년10월7일부터 약 3개월 동안 교인 3분의2인 77명이 순교하였다.
한 날 한시에 순교한 것이 아니었기에,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이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살기를 원했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셨고, 돌아갈 천국이 있었기에 하나님께 생사를 맡기고 주님을 바라보며 찬송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다.
염산교회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수난의 기간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1.2.3대 교역자 순교
특히 당시 염산교회를 담임하던 김방호 목사 일가족을 비롯해 초대교역자였던 허상 전도사(순교 당시 장로) 부부, 제2대 원창권 목사까지 역대 교역자 3명이 모두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제1대 교역자 허상전도사의 순교
일제 강점기인 1939년9월20에 시작된 염산교회의 초대교역자로 초빙을 받아 1940년2월1일에 부임하였다. 강대상에 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불을 품어 쏟아 내는듯한 강렬함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교회에 모여들었으며 어느덧 염산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1947년 10월 4일 허상 전도사의 은퇴를 앞두고 2대 교역자 원창권 목사가 부임을 하게 되었다
1948년 4월7일 염산교회는 원창권목사 위임감사 예배와 함께 허상 전도사 은퇴 및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다. 장로로 장립을 받은 그는 장로로서 계속 교회와 성도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보살폈고, 그런 가운데 6·25전쟁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지만 허상 장로 부부는 피난을 가지 않고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매일 기도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결국 허상 장로부부도 1950년 10월 13일에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
하얀 한복차림에 새끼줄에 묶인 허상장로는 공산당이 죽창으로 찌를 때마다 “아멘! 아멘!”하면서 한시골짜기까지 끌려갔다.
그는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께로 가리라’ 찬송하면서 자신을 죽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였고, 부인 이순심집사도 남편 허상장로를 따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공산당들을 용서해주세요’ 기도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제2대 교역자 원창권목사님의 순교
1947년 10월4일 염산교회로 부임한 원창권 목사는 장남이 헌병장교로 헌병대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철저한 반공교육을 젊은 교인들과 청년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6.25 전쟁 전, 이 지역에는 북한에서 해안을 따라 남하한 공산군들과 지역 좌익세력들이 합세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교회는 지역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세력의 표적이 되어 위협을 당하고 있던 중에 염산교회 다니는 한 교인이 밤길에 공산 유격대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원창권목사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1949년2월10일 무조건 교회를 사임하고 영광읍으로 이사하여 지내다가 6.25를 만나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묘량에서 공산당들에게 붙잡혀 순교(염산교회순교자는 아니다)하였다.

제3대 교역자 김방호목사님의 순교
1888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민족적 인물이었다. 그와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부친(김기삼)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는데 함경북도 삼수갑산 지방의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사경회에 참석하였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개성으로 내려가 한영서원을 졸업하고 교원생활을 하던 중 전남지방 도대선 선교사의 조사로 많은 노력을 했고, 소룡리 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가 된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에 평양신학교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창권 목사 사임 후 생명의 위협이 있는 염산교회에 후임으로 오는 목회자가 없었다. 1년 여간 교역자가 없이 지내온 염산교회에 6.25가 일어나던 해인 1950년 3월 10일에 순교를 각오한 김방호 목사가 제3대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6. 25가 터지고 교회에 수난이 닥치자 김동근장로와 김형호집사 부자가 목선을 준비하고 피난을 권유했지만 "목사가 어떻게 목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하며 목자로서 양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피난을 거부하고 은밀하게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며 예배를 드렸지만 주변 상황이 살벌하여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세례 받은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장병태 성도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려 달라고 목사님을 자기의 집에 모셨고, 두 아들 현과 정은 김덕춘 집사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카타콤에서와 같은 생활이었다.
결국 10월 27일 지방 빨갱이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 미군스파이로 몰려 김 목사님의 여덟 식구 (사모님, 5자녀, 손녀)가 한 날 한 시에 몽둥이에 맞아 순교를 당하였다.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며. 찬송을 부르면서 영광된 순교의 길을 가신 것이다.
이렇게 염산교회는 제1대 허상전도사. 2대 원창권목사, 3대 김방호목사 모두가 순교하였다.

3) 천국을 소망하며 순교자의 길을 간 주일학생들
믿음으로 천국신앙을 가지고 순교자의 길을 간 여러 성도들의 일화가 있지만 여기에 어린 주일학생들의 순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10월13일, 김옥자 김금자 김신자 김미자 네 자매는 염산교회 주일학생이며 믿는 집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순교현장에 끌려가는데, 옥자는 무서워서 우는 동생들을 향하여 “울지 마라 우리는 천국 가고 있단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 울지 마라!”고 달랬다.
바닷가 수문통에 가서도 어린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기도하며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담대한 모습에 수장을 시키는 공산당원들과 좌익세력들이 오히려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12월4일, 11살 김조남 어린이는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전쟁 때문에 집에 와서 있었는데 공산당들이 할아버지인 김동근 장로와 아버지 김형호 집사를 잡으려고 들이닥쳤지만 찾지 못하자 김조남 어린이를 붙잡아 다그쳤다.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있는 곳을 대라.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다.”

김조남 어린이는 살기가 등등한 공산당들 앞에서 담대하게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 있는 곳을 알지 못해요,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화가 난 공산당원이 김조남 어린이의 입을 손으로 찢어서 죽이고 말았다.

11살짜리 어린 소년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향하여 갔다.

이 외에도 많은 순교의 일화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안일한 신앙과 하늘의 것을 바라보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는데 지면상 생략하고자 한다.

노병재집사 집안 22명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은 바닷가 수문통에서 목에 돌멩이를 달고 새끼줄에 묶여 수장을 당하는 중에도 숨이 넘어갈 때까지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하였고, 구덩이에 생매장을 당하고,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서, 칼에 목을 베이면서도 천국을 바라보며 순교자의 길을 갔다.

생명보다 믿음을 소중하게 여긴 염산교회 성도들은 천국의 소망으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3. 순교성지 염산교회 오늘의 모습

우리 염산교회는 앞서간 순교자들의 신앙을 계승하며 순교신앙을 널리 전파하고자 힘쓰고 있다.

순교당시의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꾸며진 영상물이 준비되어 있고, 전시관에는 순교자들의 사진과 유품등 순교의 흔적들이 전시되어 순례자들에게 순교 신앙을 마음 깊이 담을 수 있게 하고 있다.

많은 순교자들이 새끼줄에 묶인 채 돌을 매달고 바닷물에 수장 당한 상황을 체험케 하고자 순교현장에서 가져온 돌 목걸이를 준비해 두었는데 순례자들은 돌 목걸이를 목에 걸어보며 순교자를 생각하고 순교현장인 바닷가에 가서 엄숙한 마음으로 순교자의 신앙 따라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며 헌신할 것을 다짐하곤 한다.

교회 앞 소공원에 마련된 순교자 묘와 순교기념비, 그리고 “우리는 천국간다” 시비 등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나아간 순교자의 신앙을 마음 깊이 간직하게 한다.

한국최대순교성지인 염산교회는 지난 2015년6월1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 제1호 순교사적지로 지정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순교성지의 면모를 갖추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성도들에게 순교신앙을 전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순교를 요구하는 때에 살고 있지 않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생명을 내놓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오늘의 성도들이 하늘의 것보다는 땅엣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에 순교자들이 가졌던 천국신앙을 다짐해 본다.

순교자들은 내 앞에 열리는 천국을 바라보았기에 죽음도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담대함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도 순교신앙을 가지고 내 앞에 열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늘 감사하고, 찬송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염산교회 임준석목사

728x90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